1청일 전쟁

일본 제국은 청일 전쟁(1894~95)에서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단명한 대한제국을 출범시켰다.

2을사늑약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3대한민국 임시 정부

많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국외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중국에서 수립되었다.

4카이로 회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 영국, 미국은 모두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결정했다.

5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소련은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3일 후인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6붉은 군대의 한반도 북부 점령 시작

8월 10일까지 붉은 군대는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7한반도를 소련과 미국의 점령 구역으로 분할

8월 10일 밤 워싱턴에서 미군 대령 딘 러스크와 찰스 H. 보니스틸 3세는 한반도를 소련과 미국의 점령 구역으로 분할하는 임무를 맡았고 38선을 제안했다.

838선 이남의 일본군 항복 접수

1945년 9월 8일, 미 육군 중장 존 R. 하지(John R. Hodge)가 38선 이남의 일본군 항복을 받기 위해 인천에 도착했다.

9한반도에서 철수

소련은 합의에 따라 1948년 한국에서 철수했고, 미군은 1949년에 철수했다.

10남한 총선거 실시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11대한민국 대통령

결성된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고,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2대한민국(남한)

대한민국(남한)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다.

13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북한은 3개월 후인 8월 25일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14스탈린의 승인

1950년 4월, 스탈린은 필요시 마오쩌둥이 증원군을 보내기로 동의한다는 조건하에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가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이 공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15마오쩌둥(중국 지도자)과의 회담

김일성은 1950년 5월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했지만 북한의 침공을 지원하기로 동의했다. 중국은 소련이 약속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16북한군 병력 규모

1950년 6월, 미국 정보국에 따르면 북한군은 10개 보병 사단, 1개 전차 사단, 1개 공군 사단으로 조직된 74,370명의 조선인민군 병력과 20,000명의 국경경비대로 구성되었으며, 210대의 전투기와 28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개성, 춘천, 의정부, 옹진 등 예정된 목표와 영토를 점령했다.

17김일성의 전국 선거 및 협의회 소집 요구

1950년 6월 7일, 김일성은 1950년 8월 5~8일에 전국 선거를, 1950년 6월 15~17일에 해주에서 협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18북한이 평화 제의로 3명의 외교관을 남한에 파견

6월 11일, 북한은 평화 제의로 3명의 외교관을 남한에 보냈으나 이승만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9김일성의 전쟁 계획 수정

6월 21일, 김일성은 옹진반도에서의 제한적인 작전 대신 38선을 가로지르는 전면 공격을 포함하도록 전쟁 계획을 수정했다. 김일성은 남한 요원들이 계획을 알아차렸고 남한군이 방어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계획 변경에 동의했다.

20북한군(인민군)의 국경 돌파 및 남한 진격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인민군)이 국경을 넘어 남한으로 진격하면서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1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 침공 만장일치 규탄

1950년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안보리 결의 제82호를 통해 북한의 남한 침공을 만장일치로 규탄했다.

22이승만의 서울 탈출

6월 27일, 이승만은 일부 정부 인사들과 함께 서울을 탈출했다.

23결의안 제83호

이 문제를 논의한 후, 안전보장이사회는 1950년 6월 27일 회원국들에게 대한민국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 제83호를 발표했다.

24남한 지원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미 공군과 해군에게 남한을 도울 것을 명령했다.

25정치적 반대파 학살

6월 28일, 이승만은 자국 내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학살을 명령했다.

26한강교 폭파

6월 28일 오전 2시, 대한민국(남한)은 인민군(북한)의 진격을 막기 위해 한강교를 폭파했다.

27소련 외무차관의 미국 비난

7월 4일, 소련 외무차관은 미국이 남한을 대신하여 무력 개입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28오산 전투

한국 전쟁에서 미군의 첫 주요 교전인 오산 전투에는 일본에서 공수된 제24보병사단의 소규모 전방 부대인 540명 규모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투입되었다. 1950년 7월 5일, 스미스 부대는 오산에서 인민군을 공격했으나 인민군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그들은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180명이 전사,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다.

29맥아더 장군이 미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 R. 게이 소장에게 인천 상륙 작전 계획을 명령

재정비하고 무장한 부산 교두보 방어군과 증원군에 맞서, 조선인민군(KPA)은 병력이 부족하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유엔군과 달리 그들은 해군과 공군의 지원이 부족했습니다. 부산 교두보를 구원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은 서울 인근이자 조선인민군 전선 후방 160km(100마일) 이상 떨어진 인천에 상륙 작전을 펼칠 것을 권고했습니다. 7월 6일, 그는 미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 R. 게이 소장에게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하라고 명령했습니다.

30부산 교두보

전쟁 발발 후 두 달이 지난 시점, 장비가 부족하고 준비가 미흡했던 대한민국 국군(ROKA)과 급히 한국으로 파견된 미군은 패배 직전의 상황에 몰려 '부산 교두보'라고 알려진 방어선 뒤의 작은 지역으로 후퇴했습니다.

31마오쩌둥, 한국전 개입을 정치국에 보고

1950년 8월 4일, 미국의 강력한 해군력으로 인해 대만 침공 계획이 무산되자, 마오쩌둥은 중국인민해방군(PLA)의 대만 침공 부대가 동북변방군으로 재편되면 한국전에 개입하겠다고 정치국에 보고했습니다.

32중국의 경고

1950년 8월 20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유엔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이다... 중국 인민은 한국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은 중립국 외교관들을 통해 중국의 국가 안보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 내 유엔군에 맞서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33제67전투비행대대 항공기가 실수로 중국 영토 내 시설을 공격

8월 27일, 제67전투비행대대 항공기가 실수로 중국 영토 내 시설을 공격했고, 소련은 이 사건에 대한 중국의 항의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기했습니다.

34유엔군의 상륙 반격

1950년 9월, 인천에서 유엔군의 상륙 반격이 시작되었고, 이는 한국 내 많은 조선인민군 부대를 고립시켰습니다.

35인천의 상륙 돌격 부대는 소수의 조선인민군 방어군과 마주함

9월 15일까지 인천의 상륙 돌격 부대는 소수의 조선인민군 방어군과 마주했습니다. 군사 정보, 심리전, 유격 정찰, 그리고 장기간의 포격이 비교적 가벼운 전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포격으로 인해 인천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36미 제8군, 부산 교두보에서 돌파 작전 시작

9월 16일, 미 제8군은 부산 교두보에서 돌파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린치 특수임무부대, 제7기병연대 제3대대, 그리고 두 개의 제70전차대대 부대(찰리 중대 및 정보정찰소대)는 171.2km(106.4마일)의 조선인민군 점령지를 뚫고 진격하여 9월 27일 오산에서 제7보병사단과 합류했습니다.

37스탈린, H. M. 자카로프 장군을 북한에 파견

9월 18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부산 교두보 주변의 공세를 중단하고 서울 방어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하라고 조언하기 위해 H. M. 자카로프 장군을 북한에 파견했습니다.

38유엔군, 서울 탈환

9월 25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미군의 공습은 조선인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대부분의 전차와 상당수의 포병 전력을 파괴했습니다. 남한에 있던 조선인민군 부대는 효과적으로 북쪽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급격히 와해되어 평양을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39맥아더, 국가안전보장회의 일급비밀 각서 수령

9월 27일, 맥아더는 트루먼으로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 일급비밀 각서 81/1호를 전달받았습니다. 이 각서는 38선 이북에서의 작전은 "작전 당시 소련이나 중국 공산군이 북한에 진입하지 않았고, 진입 의사를 밝히지 않았으며, 우리의 작전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위협이 없을 경우"에만 승인된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40스탈린, 패배의 책임을 소련 군사 고문들에게 돌림

9월 27일, 스탈린은 정치국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군 지휘부의 무능함을 비난하고 패배의 책임을 소련 군사 고문들에게 돌렸습니다.

41맥아더, 이승만 정부 복구

9월 29일,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 하의 대한민국 정부를 복구했습니다.

42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미국에 경고

9월 30일, 저우언라이는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미국에 경고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1930년대 장제스의 포위 토벌 작전에서 중국 공산군이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여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에게 총퇴각을 수행하는 방법을 조언하려 했으나, 일부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은 이러한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43대한민국 경찰, 북한 동조 혐의자 처형

10월 중, 대한민국 경찰은 북한에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형했으며, 이와 유사한 학살이 1951년 초까지 자행되었습니다.

44유엔군, 북한 침공

유엔군은 1950년 10월 북한을 침공하여 압록강(중국과의 국경)을 향해 빠르게 진격했습니다.

45유엔군, 조선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

1950년 10월 1일까지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했으며, 국군은 그 뒤를 따라 북한으로 진격했습니다.

46중국 비상회의

10월 2일부터 5일까지 이어진 일련의 비상회의에서 중국 지도부는 중국군을 한국에 파병할지 여부를 논의했습니다.

47유엔군, 국군을 따라 북진

맥아더는 조선인민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6일 후인 10월 7일, 유엔의 승인을 받아 유엔군은 국군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했습니다.

48중국인민지원군

1950년 10월 8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PVA)으로 재명명했습니다.

49저우언라이와 중국 대표단, 모스크바 도착

스탈린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저우언라이와 중국 대표단은 10월 10일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흑해에 있는 스탈린의 별장으로 비행했습니다.

50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회담

한편, 1950년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웨이크 섬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51중국, 전쟁 개입

1950년 10월 18일 베이징으로 돌아오자마자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펑더화이, 가오강과 회동했으며, 이들은 20만 명의 중국인민지원군(PVA)에게 북한으로 진입할 것을 명령했고, 그들은 10월 19일에 진입했다.

52중국인민지원군(PVA)이 압록강을 건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PVA)이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개입했다. 중국의 기습적인 개입으로 유엔군은 12월 말까지 38선 아래로 후퇴하게 되었다.

53평양 점령

미 제8군은 한반도 서부를 북상하여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54중국인민지원군 제1차 공세

10월 19일 압록강을 비밀리에 건넌 중국인민지원군(PVA) 제13병단은 10월 25일 제1차 공세를 시작하여 북중 접경 지역 근처에서 진격하던 유엔군을 공격했다.

55유엔군, 원산과 이원 상륙

유엔군은 10월 26일 원산(북한 남동부)과 이원(북한 북동부)에 상륙했으나, 이 도시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56중국군과 미군의 첫 교전

온정리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2군단에 큰 피해를 입힌 후, 1950년 11월 1일 중국군과 미군 사이의 첫 교전이 발생했다.

57전쟁 수행의 총사령관이자 조정자

11월 13일,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전쟁 수행의 총사령관이자 조정자로 임명하고, 펑더화이를 현장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58크리스마스 이전 귀환 공세

11월 24일, 미 제8군이 북한 북서부로 진격하고 미 제10군단이 한국 동해안을 따라 공격하면서 '크리스마스 이전 귀환 공세(Home-by-Christmas Offensive)'가 시작되었습니다.

59청천강 전투

11월 25일 한국 서부 전선에서 중국인민지원군(PVA) 제13병단이 청천강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공격하여 격파했으며, 이후 유엔군 우측 측면에 있던 미 제2보병사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60장진호 전투

11월 27일 동부 전선에서 중국인민지원군(PVA) 제9병단이 장진호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61흥남 항구 도시의 방어선

제10군단은 12월 11일 흥남 항구 도시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며, 남쪽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은 미 제8군을 증원하기 위해 12월 24일까지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62국가 비상사태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포고 제2914호, 3 C.F.R. 99 (1953)를 통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이는 1978년 9월 14일까지 유지되었습니다.

63조선인민군(KPA) 지휘권

다음 날인 1950년 12월 17일, 김일성은 중국에 의해 조선인민군(KPA) 지휘권을 박탈당했습니다.

64자동차 사고

1950년 12월 23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면서 유엔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65미 제8군 지휘권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12월 26일 미 제8군 지휘권을 인수했습니다.

66중국군 춘계 공세

PVA와 KPA는 1950/51년 섣달그믐에 제3차 공세(일명 "중공군 신정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67PVA와 KPA의 서울 점령

이 공세로 유엔군은 압도당했고, PVA와 KPA는 1951년 1월 4일 두 번째로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68썬더볼트 작전

1월 말, PVA가 전선을 포기한 것을 확인한 리지웨이 장군은 위력 수색을 명령했으며, 이것이 썬더볼트 작전(1951년 1월 25일)이 되었습니다.

69분쟁의 전개

2월 중순, PVA는 제4차 공세로 반격하여 횡성에서 초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세는 곧 중앙의 지평리에서 미 제9군단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미 제23연대 전투단과 프랑스 대대는 짧지만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공격의 기세를 꺾었습니다. 이 전투는 때때로 "한국전쟁의 게티즈버그 전투"로 알려져 있는데, 5,600명의 한국군, 미군, 프랑스군이 25,000명의 PVA에 의해 사방이 포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유엔군은 대규모 PVA/KPA 병력에 직면하면 고립되지 않기 위해 후퇴했으나,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고 싸워 승리했습니다.

70유엔 총회, 결의안 498호 통과

1월 휴전 협상이 결렬된 후, 유엔 총회는 2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국에서 병력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498호를 통과시켰습니다.

71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1951년 3월 1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군이 직면한 어려움과 특히 보급로 상공에서의 항공 엄호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중국의 전쟁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스탈린은 공군 2개 사단, 대공포 3개 사단, 트럭 6천 대를 지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72서울에서 축출된 조선인민군(KPA)과 중국인민지원군(PVA)

1951년 3월 7일, 미 제8군은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을 개시하여 1951년 3월 14일 서울에서 중국인민지원군(PVA)과 조선인민군(KPA)을 몰아냈습니다.

73토마호크 작전(Operation Tomahawk)

토마호크 작전(Operation Tomahawk)은 한국 전쟁 중 커리지어스 작전(Operation Courageous)의 일환으로 1951년 3월 23일 문산리에서 제187연대전투단(187th RCT)이 수행한 공수 군사 작전입니다. 커리지어스 작전은 대한민국 육군(ROK) 제1군단 맞은편인 서울 북쪽 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다수의 중국인민지원군(PVA)과 조선인민군(KPA) 병력을 가두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커리지어스 작전의 의도는 미 제25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한국군 제1사단으로 구성된 미 제1군단이 PVA/KPA 진지로 신속하게 진격하여 가능한 한 빨리 임진강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74용감한 작전(Operation Courageous)

용감한 작전(Operation Courageous)은 한국 전쟁 중 유엔군 사령부(UN)가 수행한 군사 작전으로, 대한민국 육군(ROK) 제1군단 맞은편인 서울 북쪽 한강과 임진강 사이에 다수의 중국인민지원군(PVA)과 조선인민군(KPA) 병력을 가두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미 제25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미 제1군단이 PVA/KPA 부대를 향해 신속하게 진격하여 가능한 한 빨리 임진강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75맥아더 장군을 주한 유엔군 최고사령관에서 해임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주한 유엔군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했습니다. 해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38선을 넘어 연합군에 큰 손실을 입혔습니다. 그는 핵무기 사용 여부가 대통령이 아닌 자신의 결정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76맥아더, 의회 청문회 대상이 되다

맥아더는 1951년 5월과 6월에 열린 의회 청문회의 대상이 되었으며, 청문회 결과 그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여 미국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77장기화된 휴전 협상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유엔군과 PVA/KPA는 교전을 계속했으나 교착 상태가 유지되면서 영토 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계속되었고, 1951년 7월 10일 PVA/KPA 점령지 내에 위치한 북한의 옛 수도 개성에서 장기적인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78펀치볼 전투

펀치볼 전투는 한국 전쟁의 기동 단계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 중 하나입니다. 1951년 8월 휴전 협상이 결렬된 후, 유엔군 사령부(UN)는 전선을 단축 및 직선화하고 더 나은 방어 지형을 확보하며 적이 유엔군 진지를 관측하고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주요 요충지를 거부하기 위해 늦여름/초가을에 제한적인 공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블러디 리지(Bloody Ridge) 전투는 1951년 8월부터 9월까지 펀치볼 서쪽에서 벌어졌고, 이어 1951년 9월부터 10월까지 펀치볼 북서쪽에서 하트브레이크 리지(Heartbreak Ridge) 전투가 뒤따랐습니다. 1951년 10월 유엔군의 공세가 끝날 무렵, 유엔군은 펀치볼 북쪽의 언덕 능선을 장악했습니다.

79블러디 리지 전투

블러디 리지 전투는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한국 전쟁 중에 발생한 지상 전투입니다. 1951년 여름, 개성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면서 한국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대치 중인 양측 군대는 한반도 중앙의 산악 지대인 38선 북쪽 몇 마일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 동서로 뻗은 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습니다. 유엔군과 북한 조선인민군(KPA) 및 중국인민지원군(PVA)은 이 전선을 따라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다투며 비교적 작지만 강렬하고 피비린내 나는 여러 전투를 벌였습니다. 블러디 리지는 유엔군이 유엔군 보급로에 포격을 가하기 위한 관측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판단한 언덕 능선을 점령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습니다.

80하트브레이크 리지 전투

웬덩리(Wendengli) 전투라고도 알려진 하트브레이크 리지 전투는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5일까지 한국 전쟁 중 한 달간 지속된 전투입니다. 블러디 리지에서 철수한 조선인민군(KPA)은 불과 1,500야드(1,400m) 떨어진 7마일(11km) 길이의 산악 지대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이곳의 방어 시설은 블러디 리지보다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하트브레이크 리지 전투는 철원 근처, 38선(전쟁 전 남북 경계선) 북쪽 몇 마일 떨어진 북한의 언덕에서 벌어진 여러 주요 교전 중 하나였습니다. 중국 측에게 이 전투는 종종 1년 후 발생한 삼각고지 전투와 혼동되기도 합니다.

81군사위원회, PVA의 군수 문제 논의

1952년 2월 24일, 저우언라이가 주재한 군사위원회는 전쟁 노력에 관여하는 다양한 정부 기관 관계자들과 함께 PVA의 군수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82힐 이리 전투

힐 이리 전투는 1952년 철원 서쪽 약 10마일(16km) 지점에 있는 군사 전초기지인 힐 이리(Hill Eerie)에서 유엔군 사령부(UN)와 중국인민지원군(PVA) 사이에 벌어진 여러 한국 전쟁 교전을 의미합니다. 이 고지는 양측에 의해 여러 번 점령되었으며, 각 측은 상대의 진지를 파괴했습니다.

83올드 발디 전투

올드 발디 전투는 한국 중서부의 266고지를 둘러싼 5차례의 교전을 의미합니다. 이 전투들은 1952~1953년 10개월에 걸쳐 발생했으며, 이 교전 전후로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1952년 유엔군 승리, 1953년 중국군 승리

84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 중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에 있는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로, 철의 삼각지대는 정점인 평강과 밑변인 김화읍 및 철원읍으로 형성된 한반도 중부 지역의 전략적 교통로입니다.

85삼각고지 전투

쇼다운 작전(Operation Showdown) 또는 상감령 전투라고도 알려진 삼각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 중 벌어진 장기적인 군사 교전입니다. 주요 전투원은 유엔군(UN) 보병 2개 사단이었으며, 미 공군의 추가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PVA) 제15군 및 제12군 부대와 맞섰습니다. 이 전투는 '철의 삼각지대'를 장악하려는 유엔군의 시도 중 하나였으며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86새로운 미국 대통령

1952년 미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1952년 11월 29일 대통령 당선자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한국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87포크찹 고지 전투

포크찹 고지 전투는 1953년 4월과 7월에 걸쳐 일어난 두 차례의 한국 전쟁 보병 전투를 말합니다. 이 전투들은 유엔군 사령부(UN)와 중국 및 북한군이 한국 정전 협정을 협상하는 동안 벌어졌습니다. 미국에서는 전략적 또는 전술적 가치가 없는 지형을 위해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다는 점 때문에 논란이 되었지만, 중국군은 미군 전사자 및 부상자 수의 몇 배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첫 번째 전투는 S.L.A. 마셜이 쓴 동명의 역사서 '포크찹 고지: 한국, 1953년 봄, 미국 전투원의 활약(Pork Chop Hill: The American Fighting Man in Action, Korea, Spring 1953)'에 묘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화 '포크찹 고지'가 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전투는 유엔군이 승리했으나, 두 번째 전투는 중국군이 승리했습니다.

88해리 전초기지

해리 전초기지는 한반도의 '철의 삼각지대'라고 흔히 불리는 곳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했던 한국 전쟁의 외딴 전초기지였습니다. 이곳은 서울에서 북동쪽으로 약 60마일(100km) 떨어진 지역으로, 대한민국 수도로 향하는 가장 직접적인 경로였습니다.

89금성 전투

금성 전투는 진성 작전(Jincheng Campaign)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한국 전쟁의 마지막 전투 중 하나입니다. 한국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휴전 협상 과정에서 유엔군 사령부(UNC)와 중국 및 북한군은 포로 송환 문제에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휴전 협정 서명을 거부한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은 송환을 거부한 북한군 포로 27,000명을 석방했습니다. 이 조치는 중국과 북한 사령부의 격분을 샀으며 진행 중이던 협상을 결렬시킬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은 금성 돌출부를 겨냥한 공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중 중국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으며, 유엔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90한국 정전 협정

조선인민군(KPA), 중국인민지원군(PVA) 및 유엔군 사령부는 1953년 7월 27일에 한국 정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91북한, 정전 협정 무효화 주장

새로운 유엔 제재가 가해진 후, 2013년 3월 11일 북한은 정전 협정이 무효화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92북한, 1953년 정전 협정 종료 확인

2013년 3월 13일, 북한은 1953년 정전 협정을 종료했음을 확인하고 북한은 '남북 불가침 선언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93전시 상태

2013년 3월 30일, 북한은 대한민국과 '전시 상태'에 돌입했다고 밝히며 '한반도의 오랜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가 마침내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94핵무기 사용 가능성

2013년 4월 4일,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평양이 괌과 하와이를 포함한 대한민국, 일본, 미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비준'했다고 펜타곤에 '공식 통보'했다고 밝혔습니다.

9565년간 지속된 갈등 종식

2018년 4월 27일, 북한과 대한민국이 65년간 지속된 갈등을 종식하기 위한 회담에 합의했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양측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