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로마 원로원

로마 원로원은 고대 로마의 통치 및 자문 의회였다.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제도 중 하나로, 로마 시가 건국된 초기(전통적으로 기원전 753년 건국)부터 설립되었다.

2판아테나이아 제전

판아테나이아 제전은 기원전 566년부터 서기 3세기까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4년마다 열렸다.

3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전설적인 로마의 제7대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535년부터 로마 공화정 수립으로 이어진 기원전 509년의 민중 봉기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왕정 폐지를 정당화한 폭정으로 묘사된다.

4타르퀴니우스의 즉위

타르퀴니우스는 제5대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었다. 기원전 535년경 타르퀴니우스는 아내 툴리아 미노르와 함께 세르비우스 살해를 공모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5로마 공화정의 행정관

로마 공화정의 행정관은 로마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고대 로마 공화정의 관리들이었다.

6왕정 폐지 법안

원로원은 왕정을 폐지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왕의 기존 기능 대부분은 두 명의 별도 집정관에게 이양되었다. 이 집정관들은 1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7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의 루크레티아 강간

리비우스에 따르면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셋째이자 막내아들이었으나,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그는 세 아들 중 장남이었다.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그의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은 왕정 폐지와 로마 공화정 수립의 도화선이 되었다.

8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또는 푸블리콜라는 왕정을 타도하고 로마의 집정관이 된 4명의 로마 귀족 중 한 명으로, 전통적으로 로마 공화정의 첫해로 간주되는 기원전 509년에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동료였다.

9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의 반전설적인 창시자이자, 전통적으로 기원전 509년 최초의 집정관 중 한 명이다. 그는 루크레티아의 자살 이후 자신의 외삼촌인 로마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축출하는 데 책임이 있었으며, 이는 로마 왕정 폐지로 이어졌다.

10켄투리아 민회

켄투리아 민회는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이 수립되기 1세기 전, 전설적인 로마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 의해 창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로마 공화정 헌정사의 시작

로마 공화정의 헌정사는 기원전 509년 왕정을 타도한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12레길루스 호수 전투

레길루스 호수 전투는 로마 공화정 수립 직후 라틴 전쟁의 일환으로 벌어진 라틴 동맹에 대한 로마의 전설적인 승리이다. 라틴군은 기원전 509년에 축출된 로마의 제7대 마지막 왕인 노년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그의 사위이자 투스쿨룸의 독재관인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가 이끌었다.

13실바 아르시아 전투

실바 아르시아 전투는 기원전 509년 고대 로마의 공화정 군대와 폐위된 로마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이끄는 타르퀴니와 베이의 에트루리아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로마 영토 내의 실바 아르시아(아르시아 숲)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나, 로마의 집정관 중 한 명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전사했다.

14로마 왕정 폐지

고대 로마의 정치 혁명이었던 로마 왕정 폐지는 기원전 509년경에 일어났으며, 로마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축출하고 로마 공화정을 수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5발레리우스가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집정관 발레리우스는 패배한 에트루리아인들의 전리품을 챙겨 기원전 509년 3월 1일 개선식을 거행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16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되찾는 데 실패했다

타르퀴니우스는 타르퀴니이와 베이이의 동맹군을 이용해 왕위를 되찾는 데 실패하자, 기원전 508년 클루시움의 왕 라르스 포르세나에게 도움을 구했다. 클루시움은 당시 강력한 에트루리아 도시였다.

17라르스 포르세나

라르스 포르세나는 로마 시와의 전쟁으로 알려진 에트루리아 왕이다. 그는 클루시움(에트루리아어: Clevsin, 현대의 키우시) 시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에 대한 확정된 날짜는 없으나, 로마의 사료들은 종종 이 전쟁을 기원전 508년경으로 기록한다.

18포르세나가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평화를 제안했다

포르세나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평화를 제안했다. 조건이 협상되었다. 포르세나는 타르퀴니우스에게 왕위를 돌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로마인들은 거절했다.

19포르세나가 로마를 공격했다

포르세나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가 도시로 이어지는 테베레 강의 다리 중 하나인 폰스 수블리키우스로 몰려들자, 푸블리우스 호라티우스 코클레스가 다리를 건너 적을 막아섰고, 그사이 로마인들은 다리를 파괴할 시간을 벌었다. 그는 티투스 헤르미니우스 아퀼리누스와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와 합류했다. 헤르미니우스와 라르티우스는 다리가 거의 파괴될 무렵 후퇴했다. 호라티우스는 다리가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의 화살을 받으며 강을 헤엄쳐 돌아왔다.

20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자 포르세나는 다음으로 도시를 봉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야니쿨룸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강을 통한 운송을 차단했으며, 주변 시골 지역으로 약탈대를 보냈다.

21포르세나가 다시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냈다

기원전 507년 포르세나는 다시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타르퀴니우스의 왕위 복귀를 요청했다. 로마는 사절을 포르세나에게 돌려보내 로마인들은 결코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포르세나는 로마인들을 존중한다면 타르퀴니우스의 복귀 요청을 중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22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

스푸리우스 라르키우스는 초기 로마 공화정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두 번 집정관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명성은 클루시움의 왕 라르스 포르세나의 군대에 맞서 수블리키우스 다리를 지킨 수비대원 중 한 명으로서 얻은 것이다.

23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볼루수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볼루수스는 기원전 505년 푸블리우스 포스투미우스 투베르투스와 함께 로마 집정관을 지냈다. 그는 볼레수스 발레리우스의 아들이자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형제였다. 기원전 505년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사비니족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두 집정관 모두 개선식을 거행했다.

24로마-사비니 전쟁

기원전 505~504년에는 공화정 로마와 사비니족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리비우스는 에트루리아인의 개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25오피테르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

오피테르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는 기원전 502년 스푸리우스 카시우스 베켈리누스와 함께 초기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강력한 베르기니아 가문에서 처음으로 집정관직을 얻은 인물이었다.

26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코르누투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코르누투스는 기원전 500년 마니우스 툴리우스 롱구스와 함께 로마의 집정관이었다. 그는 라티움의 카메리아 또는 카메리움 마을에서 이름을 따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귀족 가문 술피키우스 가문의 첫 집정관이었다. 그는 기원전 490년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코르누투스의 아버지였다. 또한 그는 고대 문헌에서 기원전 463년에 큐리오 막시무스(curio maximus) 직위를 맡은 것으로 명확히 식별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27평민과 귀족 간의 갈등 또는 투쟁

신분 투쟁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평민(일반 시민)과 귀족(상류층) 사이에서 기원전 500년부터 287년까지 지속된 정치적 투쟁으로, 평민들이 귀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추구한 사건이다. 이는 로마 공화정 헌법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8티투스 아에부티우스 헬바

티투스 아에부티우스 헬바는 초기 공화정 시대의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으로, 기원전 499년에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그는 레길루스 호수 전투에서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 휘하의 기병대장이었다. 그는 기원전 463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아에부티우스 헬바의 아버지였다.

29퀸투스 클로엘리우스 시쿨루스

퀸투스 클로엘리우스 시쿨루스는 기원전 5세기 초의 로마 공화정 정치인이자 귀족이었다. 그는 기원전 498년 티투스 라르키우스와 함께 로마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의 가문은 알바 롱가에서 유래했으며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통치기에 로마로 왔다. 그는 가문에서 처음으로 집정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30레길루스 호수 전투

레길루스 호수 전투는 로마 공화정 수립 직후 라틴 전쟁의 일환으로 라틴 동맹을 상대로 거둔 전설적인 로마의 승리였다.

31로마는 세 개의 이탈리아 부족과 전쟁 중이었다

기원전 494년 로마는 세 개의 이탈리아 부족(아이퀴족, 사비니족, 볼스키족)과 전쟁 중이었으나, 루키우스 시키니우스 벨루투스의 조언을 받은 평민 병사들은 적과 싸우러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로마 밖의 성산으로 분리해 나갔다.

32디오니시아

디오니시아는 고대 아테네에서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기 위해 열린 대규모 축제로, 비극 공연과 기원전 487년부터는 희극 공연이 중심 행사였다.

33베이이인들이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483년부터 476년까지 베이이인들은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보조병의 지원을 받아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로마 측에서는 파비우스 가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는 사실상 그 가문이 베이이를 상대로 벌인 개인적인 투쟁이 되었다. 로마는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34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 진영을 공격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전투가 소강상태인 틈을 타 로마 진영을 공격하여 예비대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공격 소식이 집정관들에게 전해졌고, 만리우스는 자신의 병사들을 진영 출구 주변에 배치하여 에트루리아인들을 포위했다.

35로마는 내부 분열로 찢겨 있었다

기원전 480년, 로마는 내부 분열로 찢겨 있었고, 이는 베이이인들이 로마의 힘을 꺾을 희망을 품고 전장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그들은 다른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군대 지원을 받았다.

36티투스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 루틸루스가 베이와의 전쟁에 배정됨

기원전 479년, 베이와의 전쟁은 집정관 티투스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 루틸루스에게 맡겨졌고, 그의 동료 카에소 파비우스는 아이퀴족의 침입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37적대 행위 재개

기원전 477년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고, 파비우스 가문이 베이 영토를 침범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발생하는 등 전투가 격화되었습니다. 베이족은 매복을 계획했고, 이는 기원전 477년 7월 18일경 크레메라 전투로 이어졌습니다.

38크레메라 전투

크레메라 전투는 기원전 477년 로마 공화국과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39로마군이 다시 한번 패배함

로마 원로원은 집정관 티투스 메네니우스 라나투스에게 군대를 주어 베이족을 공격하게 했으나, 로마군은 다시 한번 패배했습니다.

40베이족이 로마에 적대 행위를 시작함

기원전 475년, 이전 전쟁에서 베이가 패배한 지 불과 1년 만에 베이족과 사비니족이 로마에 적대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41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가 전쟁 지휘를 맡음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가 전쟁 지휘를 맡았습니다. 로마군은 라틴 동맹군과 헤르니키족의 지원군으로 보강되었습니다.

42베이족과 사비니족이 로마에 적대 행위를 시작함

기원전 475년, 이전 전쟁에서 베이가 패배한 지 불과 1년 만에 베이족과 사비니족이 로마에 적대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43발레리우스가 승리에 대한 개선식을 수여받음

발레리우스는 승리에 대한 공로로 개선식을 수여받았으며, 5월 1일에 이를 거행했습니다.

44로마의 종합적인 승리

사비니 군대는 베이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사비니의 방어선을 공격했습니다. 사비니군은 진영에서 쏟아져 나왔으나 로마군이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사비니 진영의 성문을 점령했습니다. 그 후 베이 군대가 도시에서 나와 공격했으나 무질서한 상태였고, 로마 기병대의 돌격으로 베이 군대는 패주하여 로마가 종합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만리우스는 3월 15일에 거행된 오바티오(소개선식)를 수여받았습니다.

45푸블릴리우스 법 통과

기원전 471년 푸블릴리우스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는 귀족에게서 평민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이동시킨 중요한 개혁이었습니다. 이 법은 평민 호민관 선출을 평민회로 이관하여 귀족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46알기두스 산 전투

알기두스 산 전투는 기원전 458년 라티움의 알기두스 산 근처에서 로마 공화국과 아이퀴족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로마의 독재관 루키우스 큉크티우스 킨키나투스는 패배가 예상되던 상황을 뒤집고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47마르쿠스 호라티우스 풀빌루스

마르쿠스 호라티우스 풀빌루스는 로마 왕정이 전복되던 시기, 초기 로마 공화국 이전과 당시에 활동했던 귀족이었습니다.

48코르비오 전투

코르비오 전투는 기원전 446년에 일어났습니다. 장군 티투스 큉크티우스 카피톨리누스 바르바투스와 레가투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 레길렌시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라티움 북동부의 아이퀴족과 라티움 남부의 볼스키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49카에소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카에소 파비우스 암부스투스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 전환기에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대리를 네 번 역임했습니다. 카에소는 갈리아족이 클루시움을 포위했을 때 대사로 파견되었으며, 포위 중인 갈리아족에 대한 공격에 가담했습니다. 갈리아족은 만국 공법을 위반한 세 사람을 자신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습니다.

50아우룬키족

아우룬키족은 기원전 1천 년경부터 이탈리아 남부에 거주하던 이탈리아계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로마에 패배하여 로마 공화국에 흡수되었습니다.

51켈트족의 이탈리아 침공

기원전 390년경, 여러 갈리아 부족이 북쪽에서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호전적인 부족인 세노네스족이 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에트루리아의 두 도시를 침공하면서 로마인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52알리아 전투

알리아 전투는 기원전 387년경,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브렌누스가 이끄는 갈리아 부족인 세노네스족과 로마 공화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53평민의 편에 섰던 마르쿠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385년, 포위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구한 전직 집정관 마르쿠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가 로마 약탈로 파산하고 귀족들에게 막대한 빚을 진 평민들의 편에 섰다고 전해집니다.

54데켐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

367년, 그들은 10명의 사제로 구성된 '데켐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를 창설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중 5명은 평민이어야 했으며, 이를 통해 사제직에 대한 귀족들의 독점을 깨뜨렸습니다.

55신분 투쟁의 종식 (기원전 367–287년)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이 통과되면서 귀족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쿠룰 안찰관직이 신설되었을 때는 귀족들에게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56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안은 평민 호민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가 제안하여 기원전 367년경에 통과된 일련의 법률입니다. 리비우스는 당시 평민회에 법률(leges)을 제정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로가티오(rogatio)'라고 불렀지만, 때때로 '렉스(lex)'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57로마의 타르퀴니에 대한 선전포고

타르퀴니 군대가 로마 영토를 습격하자 로마는 타르퀴니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집정관 가이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가 이 전쟁을 맡게 되었습니다.

58최초의 평민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네 번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는 356년에 최초의 평민 독재관이 되었고, 351년에는 감찰관이 되었습니다.

59시디키니족

시디키니족은 고대 이탈리아의 이탈리아계 민족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수도인 테아눔 시디키눔(오늘날의 테아노)에서 북쪽으로 리리 강 계곡을 따라 프레겔라에까지 뻗어 있었으며, 총 면적은 약 3,000제곱킬로미터(1,200제곱마일)에 달했습니다.

60제1차 삼니움 전쟁

리비우스는 현대 역사학에서 제1차 삼니움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 대해 연속적인 기록을 제공하는 유일하게 보존된 사료입니다. 또한, '승전 기록(Fasti Triumphales)'에는 이 전쟁과 관련된 두 번의 로마 개선식이 기록되어 있으며, 리비우스가 기술한 사건 중 일부는 다른 고대 작가들에 의해서도 언급됩니다.

61라틴 전쟁

라틴 전쟁(기원전 340~338년)에서 로마는 베수비오 전투와 트리고눔 전투를 통해 라틴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62퀸투스가 세 가지 법을 통과시키다

기원전 339년, 평민 집정관이자 독재관이었던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는 평민의 권한을 확대하는 세 가지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63아우룬키족과 시디키니족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다

기원전 337년, 아우룬키족과 시디키니족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로마는 제1차 삼니움 전쟁 동안 로마와 싸우지 않았던 아우룬키족을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64제2차 삼니움 전쟁

약 20년이 지나고 기원전 341년의 합의 이후, 로마와 삼니움족 간의 충돌이 재개되었으며,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심 세력으로서의 존재감이 드러났습니다. 이전의 승리 이후, 그들은 지역을 확장하고 해외에서 새로운 성과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두 민족은 서로를 희생시켜 이득을 얻으려 했고, 이는 많은 긴장과 마찰을 야기하여 결국 제2차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습니다.

65로마 공화국의 원로원

원래는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이 모든 신임 원로원 의원을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원로원에서 개인을 제명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18년경, '오비니우스 국민투표'를 통해 이 권한은 다른 로마 행정관인 감찰관에게 넘어갔으며, 감찰관은 로마 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이 권한을 유지했습니다.

66귀족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다

기원전 312년, 이 법에 따라 귀족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해방 노예의 후손을 포함하여 새로운 정원인 300명을 채우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원로원 의원을 임명했습니다.

67보비아눔 전투

보비아눔 전투는 기원전 305년 로마와 삼니움족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로마의 승리였으며 제2차 삼니움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68로마, 이탈리아의 주요 강대국으로 자리 잡다

3세기 초에 이르러 로마는 이탈리아의 주요 강대국으로 자리 잡았으나, 지중해의 지배적인 군사 강국인 카르타고 및 그리스 왕국들과는 아직 충돌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694명의 평민 신관 임명

기원전 300년, 두 명의 평민 호민관 그나이우스와 퀸투스 오굴니우스는 '렉스 오굴니아(오굴니우스 법)'를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은 4명의 평민 신관을 임명하여 귀족 신관의 수와 동등하게 만들었으며, 5명의 평민 점술관을 임명하여 기존 4명의 귀족 점술관보다 더 많은 수를 확보하게 했습니다.

70루카니아 사절단이 로마로 가다

기원전 298년 초, 루카니아 사절단이 로마로 가서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삼니움족이 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자 그들의 영토를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동맹에 동의했습니다. 삼니움족에게 루카니아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하기 위해 페티알레스(종교 사절)가 삼니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71제3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299년, 에트루리아인들은 인근 움브리아의 나르니아에 세워진 로마 식민지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갈리아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침공하자, 에트루리아인들은 동맹을 맺기 위해 그들에게 돈을 제공했습니다.

72피로스는 그리스의 왕이었다

피로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왕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그리스 몰로시아 부족의 왕이자 왕실 아이아키드 가문 출신이었으며, 나중에 에페이로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기 로마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한 명이었으며 고대의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피로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왕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그리스 몰로시아 부족의 왕이자 왕실 아이아키드 가문 출신이었으며, 나중에 에페이로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기 로마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한 명이었으며 고대의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73중기 로마 공화국의 군대

중기 로마 공화국의 군대는 '마니풀루스 로마군' 또는 '폴리비오스식 군대'라고도 불리며, 삼니움 전쟁의 종결(기원전 290년)부터 동맹시 전쟁의 종결까지 중기 로마 공화국이 운용한 군대를 의미합니다.

74로마 군함들이 타렌툼 항구로 진입하다

기원전 282년, 여러 척의 로마 군함이 타렌툼 항구로 진입하여 로마 해군의 만 진입을 금지했던 공화국과 그리스 도시 간의 조약을 위반했습니다.

75포풀로니아 전투

포풀로니아 전투는 기원전 282년 로마와 에트루리아인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로마가 승리했으며, 이 전투 이후 로마에 대한 에트루리아의 위협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76피로스, 키네아스를 로마로 보내다

피로스는 평화 또는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자신의 대사로 키네아스를 로마에 보냅니다.

77피로스, 이탈리아에 상륙하다

피로스는 25,500명의 병력(및 20마리의 전투 코끼리)을 이끌고 기원전 280년 이탈리아에 상륙했으며, 즉시 타렌툼인들에 의해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최고 사령관)'로 임명되었습니다.

78피로스, 철수하여 캄파니아 근처로 이동하다

피로스는 철수하여 캄파니아 근처로 이동합니다. 라이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그와 대치합니다. 피로스는 전투를 거부하고 타렌툼으로 돌아갑니다.

79피로스, 타렌툼으로 회군하다

피로스는 로마로 진격했으나 가는 길에 로마의 도시를 하나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두 집정관의 군대에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타렌툼으로 회군했습니다.

80헤라클레아 전투

헤라클레아 전투는 기원전 280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지휘하는 에페이로스, 타렌툼, 투리, 메타폰툼, 헤라클레아의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81로마와 카르타고의 동맹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한 도서관에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 문서들을 발견했습니다.

82아스쿨룸 전투

아스쿨룸 전투는 기원전 279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가 이끄는 로마 공화국군과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이 이끄는 군대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83피로스, 시칠리아로 가다

피로스가 시칠리아로 떠난 후, 그의 두 번째 집정관 임기 중에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가 레기움의 반란군 수비대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도시를 탈환하고 주민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살아남은 반란군들은 로마로 압송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습니다.

84피로스, 타렌툼에 도착하다

피로스는 머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마메르티니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276년 가을,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렌툼에 도착했습니다.

85피로스가 삼니움의 지원 없이 로마군과 교전했습니다

피로스는 삼니움족의 지원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과 교전했습니다. 기원전 275년의 두 집정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는 각각 루카니아와 삼니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86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크로톤의 파견대를 몰아냈습니다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는 크로톤의 파견대를 몰아내고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87베네벤툼 전투

베네벤툼 전투는 피로스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 남부 베네벤툼 근처에서 그리스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 군대와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이끄는 로마군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로마의 승리였으며 피로스는 타렌툼으로, 나중에는 에피로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88전쟁의 마지막 전투

기원전 275년 피로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로마군과 베네벤툼 전투를 벌였으며, 이것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습니다.

89피로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기원전 275년, 피로스는 전면적인 반란에 직면하기 전에 섬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그의 삼니움 동맹군들은 크라니타 언덕에서의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배하기 직전이었습니다.

90제1차 포에니 전쟁

이 전쟁은 로마군이 시칠리아의 메사나(현 메시나)에 거점을 확보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91로마군이 아그라가스로 이동했습니다

기원전 262년, 로마군은 남쪽 해안으로 이동하여 아그라가스를 포위했습니다. 포위를 풀기 위해 카르타고는 60마리의 코끼리를 포함한 지원군을 보냈으나, 처음으로 코끼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92로마군이 북아프리카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로마군은 기원전 256년에 북아프리카 침공을 시작했으며, 카르타고군은 시칠리아 남쪽 해안의 에크노무스 곶 전투에서 이를 요격했습니다. 카르타고군은 다시 한번 패배했습니다.

93에크노무스 곶 전투

에크노무스 곶 전투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56년, 시칠리아 남부 해안에서 벌어진 카르타고와 로마 공화정 함대 간의 해전입니다. 카르타고 함대는 한노와 하밀카르가 지휘했고, 로마 함대는 그해의 집정관인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가 공동으로 지휘했습니다.

94시칠리아에서의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습니다

기원전 252년, 로마가 테르마에를 점령하면서 시칠리아에서의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습니다. 카르타고는 이듬해 파노르모스(현재의 팔레르모)를 점령하고 있던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를 포위하며 반격했습니다.

95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로마 공화정의 두 차례 집정관을 지낸 저명한 장군으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안티고노스 왕조를 종식시켰습니다.

96트레비아 전투

트레비아(또는 트레비아)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첫 번째 주요 전투로, 기원전 218년 12월 22일 또는 23일에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이끄는 로마군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97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부터 201년까지 지속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3세기 서부 지중해의 두 주요 강대국인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 중 두 번째 전쟁입니다.

98트라시메노 호수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17년 6월 21일,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을 매복 공격하면서 벌어졌습니다.

99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테렌티우스 바로가 가능한 최대 규모의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기원전 216년, 새로운 집정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테렌티우스 바로는 8개 군단(8만 명 이상의 병사)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보다 두 배나 많은 가능한 최대 규모의 군대를 소집하여 아풀리아의 칸나에에 주둔하고 있던 한니발과 대치했습니다.

100칸나에 전투

칸나에 전투는 기원전 216년 8월 2일 이탈리아 남동부 아풀리아의 고대 마을 칸나에 근처에서 벌어진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간의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핵심 교전입니다.

101히에로니무스가 로마와의 오랜 동맹을 깨고 카르타고 편에 섰습니다

기원전 215년, 시라쿠사의 히에론 2세가 노환으로 사망하자 그의 어린 손자 히에로니무스는 로마와의 오랜 동맹을 깨고 카르타고 편에 섰습니다.

102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카르타고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과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로마가 아이톨리아 동맹 및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1세와 연합하여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 맞서 싸운 전쟁입니다.

103바에쿨라 전투

바에쿨라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이베리아에서 벌어진 주요 야전 전투입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지휘하는 로마 공화정군과 이베리아 보조군은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을 격파했습니다.

104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베누시아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습니다

기원전 208년, 집정관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베누시아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습니다.

105메타우루스 전투

메타우루스 전투는 기원전 207년 이탈리아 메타우로 강 근처에서 벌어진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106일리파 전투

일리파 전투는 기원전 20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군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로 많은 이들이 평가하는 교전입니다.

107대평원 전투

대평원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후반기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과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108자마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

자마 전투는 기원전 202년 현재의 튀니지 자마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을 알렸습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누미디아의 지도자 마시니사의 결정적인 지원을 받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을 격파했습니다.

109로마의 "황금기"

기원전 2세기는 로마 와인 제조의 "황금기"가 시작된 시기이자 그랑 크뤼 포도원(로마 초기 일등급 포도원의 일종)이 개발된 시기입니다.

110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로마의 포풀라레스 정치인으로, 로마 국가와 부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가난한 시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농지 개혁법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귀족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그가 호민관으로 재직하던 기원전 133년에 통과되었습니다.

111로마군은 카르타고 시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시를 포위하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로마의 원정군은 기원전 149년 내내 반복적인 좌절을 겪었습니다.

112로마군이 우티카에 상륙하다

기원전 149년 후반, 대규모 로마군이 북아프리카의 우티카에 상륙했습니다.

113제3차 포에니 전쟁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서 벌어진 포에니 전쟁 중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쟁이었습니다.

114튀니스 호수 전투

튀니스 호수 전투는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인들과 로마 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진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일련의 교전이었습니다.

115네페리스 전투

기원전 147년,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봉쇄하고 디오게네스가 지휘하는 네페리스 수비대에 보내지는 모든 보급품을 효과적으로 차단했습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진영을 포위하여 그들이 밖으로 나와 더 작은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도록 강요했습니다.

116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내전에서 승리했으며,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공화정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117제1차 노예 전쟁

기원전 135년, 제1차 노예 전쟁으로 알려진 첫 번째 노예 봉기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제1차 노예 전쟁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로마 공화국에 대한 노예 반란이었습니다.

118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인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기원전 133년부터 121년 사이에 평민 호민관으로 봉사한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인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기원전 133년부터 121년 사이에 평민 호민관으로 봉사한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회적 및 헌법적 개혁과 더불어, 지금까지 주로 귀족들이 통제해 온 공공 토지인 아게르 푸블리쿠스(ager publicus)의 점유지를 도시 빈민과 퇴역 군인들에게 재분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119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가 선출되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는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원로원을 약화시키고 민주적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120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가 설치되다

기원전 121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기원전 123년 남부 갈리아에서 아르베르니족과 알로브로게스족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가 설치되었습니다.

121미트리다테스는 폰투스 왕국의 통치자였다

미트리다테스 또는 미트라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는 기원전 120년부터 63년까지 아나톨리아 북부 폰투스 왕국의 통치자였으며, 로마 공화국의 가장 강력하고 결단력 있는 적 중 한 명이었습니다.

122킴브리 전쟁

킴브리 전쟁은 로마 공화국과 유틀란트 반도에서 이주하여 로마가 통제하는 영토로 들어와 로마 및 그 동맹국들과 충돌한 게르만 및 켈트 부족인 킴브리족, 테우토네스족, 암브로네스족, 티구리니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123유구르타 전쟁

기원전 111년부터 104년까지의 유구르타 전쟁은 로마와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왕국의 유구르타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로마의 마지막 평정 작업이었으며, 이후 로마는 사막과 산이라는 자연적 장벽에 도달한 후 대륙에서의 확장을 대체로 멈췄습니다.

124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기원전 1세기의 로마 귀족이자 군인, 원로원 의원으로, 로마 공화국과 특히 귀족 원로원의 권력을 전복하려는 시도인 제2차 카틸리나 음모 사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한 베스타 처녀와의 간통 혐의를 포함하여 법정에서 여러 차례 무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25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로마의 주요 장군이자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폼페이우스 대제(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그의 세 번째 아내 무키아 테르티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입니다. 그와 그의 남동생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모두 로마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이자 원래는 보수적인 정치가가 아니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위협이 되자 더 전통적인 파벌로 돌아선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자랐습니다.

126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는 기원전 102년에 일어났습니다. 로마가 연이은 패배를 겪은 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침입하려던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을 마침내 격퇴했습니다.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은 사실상 전멸했으며, 로마 측은 20만 명을 살해하고 9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는 나중에 노예로 팔려 간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27가이우스 마리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였습니다. 킴브리 전쟁과 유구르타 전쟁의 승리자인 그는 경력 동안 전례 없는 7번의 집정관직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 군대의 중요한 개혁으로도 유명합니다.

128베르첼라이 전투

베르첼라이 전투 또는 라우디네 평원 전투는 기원전 101년 7월 30일 갈리아 키살피나의 베르첼라이 근처 평원에서 벌어졌습니다. 킴브리족 왕 보이오릭스가 지휘하는 게르만-켈트 연합군은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프로콘술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가 공동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패배했습니다.

129동맹시 전쟁

이탈리아 전쟁 또는 마르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동맹시 전쟁은 기원전 91년부터 87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이탈리아 내 여러 자치 동맹시(socii)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130후기 로마 공화국의 군대

후기 로마 공화국의 군대는 기원전 1세기 초부터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 로마군이 확립될 때까지 후기 로마 공화국이 배치한 무장 병력을 의미합니다.

131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로마 공화국의 팽창하는 제국과 그리스 세계에 대한 지배에 도전한 전쟁이었습니다.

132미트리다테스가 로마인 대다수를 살해하도록 명령하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왕국에 거주하던 8만 명의 로마인 중 대다수를 살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학살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시작된 공식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133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폰투스와 로마 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 중 하나입니다. 이 전쟁은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왕과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134콜리네 문 전투

기원전 82년 11월 1일(칼렌데스)에 벌어진 콜리네 문 전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마리우스파 사이의 내전에서 결정적인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술라는 승리하여 로마와 이탈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습니다.

135히스파니아 봉기

기원전 77년, 원로원은 술라의 전 부관 중 한 명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폼페이우스 대왕')를 보내 히스파니아의 봉기를 진압하게 했습니다.

136폼페이우스의 로마 귀환

기원전 71년경, 폼페이우스는 임무를 완수하고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같은 시기, 술라의 또 다른 전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탈리아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검투사/노예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137폼페이 원형경기장

기원전 70년경에 건설되어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 원형경기장은 한때 검투사 경기가 열리던 곳이었습니다.

138리쿠스 전투

리쿠스 전투는 기원전 6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지휘하는 로마 공화정 군대와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군대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139제2차 카틸리나 음모

카틸리나 음모라고도 알려진 제2차 카틸리나 음모는 로마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또는 카틸리나)가 동료 귀족들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불만을 품은 퇴역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의 집정관직을 전복하려던 음모였습니다.

140폼페이우스의 아시아 원정 승리 후 귀환

기원전 62년, 폼페이우스가 아시아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습니다. 카틸리나에 대한 성공에 고무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맺은 협정을 비준하기를 거부했습니다.

141카이사르의 대규모 군대 격파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과 57년에 주요 전투에서 대규모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142알레시아 전투

기원전 55년과 54년에 그는 로마인 최초로 브리타니아를 두 차례 원정했습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전투에서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143크라수스의 로마 파르티아 침공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로마의 파르티아 제국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144카르해 전투

카르해 전투는 기원전 53년 로마 공화정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에서 고대 도시 카르해(현재의 터키 하란) 근처에서 벌어졌습니다.

145카이사르의 군대와 루비콘강 도하

1월 10일, 카이사르는 자신의 베테랑 군대와 함께 로마 이탈리아의 법적 경계인 루비콘강을 건넜습니다. 이 강을 넘어서는 어떤 지휘관도 군대를 이끌고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146카이사르 내전

카이사르 내전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국으로 재편되기 전 마지막 정치·군사적 갈등 중 하나였습니다.

147원로원 최종 권고를 통한 폼페이우스의 독재관 권한 부여

기원전 49년 1월 7일,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통과시켜 폼페이우스에게 독재관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대부분 훈련되지 않은 징집병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48카이사르의 원로원에 대한 최후통첩

기원전 49년 1월 1일, 카이사르의 대리인이 원로원에 최후통첩을 전달했습니다.

149카이사르의 종신 호민관 권한 획득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는 종신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로써 그의 신체는 불가침이 되었고, 원로원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평민회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0카이사르의 원로원 의원 수 900명으로 증원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감찰관의 권한을 부여받아 이를 이용해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을 채웠습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 수를 900명으로 늘렸습니다.

151카이사르 군대의 3분의 1 손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군대의 3분의 1 정도를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탑수스 전투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폼페이우스파 군대를 격파했고, 그 후 폼페이우스파는 히스파니아로 다시 퇴각했습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152탑수스 전투

탑수스 전투는 기원전 46년 4월 6일 탑수스(현대 튀니지) 근처에서 벌어진 카이사르 내전의 교전이었습니다.

153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로마의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폼페이우스 극장 내 쿠리아 폼페이아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 도중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154해방자 내전

해방자 내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에 복수하기 위해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55제2차 삼두정치

제2차 삼두정치는 로마의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결성된 정치적 동맹으로,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독재관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로 구성되었습니다.

156필리피 전투

필리피 전투는 기원전 42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제2차 삼두정치)의 군대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주동자인 브루투스 및 카시우스의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삼두정치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157악티움 전쟁

악티움 전쟁은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내전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지원을 받음)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기원전 32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을 설득하여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했습니다.

158내전의 종식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알렉산드리아까지 추격했고, 그곳에서 두 사람 모두 기원전 30년에 자살했습니다.

159로마 민주 선거의 최종적 쇠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민주 선거는 최종적으로 쇠퇴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선거 결과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훼손했으며, 결국 선거를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160로마 공화정 헌정사의 종말

헌정사는 기원전 27년 공화정을 사실상 로마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헌법 개정과 함께 끝났습니다.

161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단계)

옥타비아누스로도 알려진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로마 프린키파투스(로마 제국의 첫 번째 단계)의 창시자로서 그의 지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능한 지도자 중 한 명이라는 유산을 공고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