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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이 타임라인의 이벤트
  1. 이슬람 아랍 영토 확장기

    8th 세기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이슬람 아랍의 영토 확장기는 8세기 이후로 끝났습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이슬람 권력 투쟁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2. 비잔티움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 제국 영토를 최대로 확장

    1025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1025년 제국의 영토를 동쪽으로 이란까지 확장하며 최대 판도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불가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을 통제했으며 지중해의 해적 활동을 진압했습니다.

  3. 만지케르트 전투

    1071비잔티움 제국 (현 말라즈기르트, 튀르키예)

    1071년 셀주크 튀르크의 산발적인 약탈을 저지하려던 비잔티움 제국의 시도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의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4. 파티마 왕조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

    1073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중동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셀주크 튀르크의 군벌 아치즈(Atsiz)에 의해 파티마 왕조로부터 빼앗겼습니다. 셀주크의 도시 점령으로 인해 순례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기독교인들이 탄압받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5. 클레르몽 공의회

    일요일 11월 17, 1095프랑스 오베르뉴 클레르몽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를 개최하여 서유럽이 성지로 향하도록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6. 라인란트 학살

    1096(현 독일)

    우르바노 교황의 선포 직후, 프랑스 사제 은둔자 피에르(Peter the Hermit)는 수천 명의 가난한 기독교인들을 이끌고 유럽을 떠났는데, 이것이 '민중 십자군'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독일을 통과하던 이 십자군 중 일부는 라인란트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을 일으켜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했습니다.

  7. 치베토트 전투

    수요일 10월 21, 1096니케아 (현 이즈니크, 튀르키예)

    그들은 1096년 십자군 주력이 치베토트 전투에서 전멸하면서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8. 니케아 공성전

    금요일 5월 14, 1097니케아 (현 이즈니크, 튀르키예)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많은 제후들을 설득하여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들의 첫 번째 목표가 니케아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치베토트에서의 성공에 고무된 과신한 셀주크군은 도시를 무방비 상태로 두었고, 이로 인해 1097년 5월~6월 니케아 공성전 끝에 도시가 함락되었습니다.

  9. 도릴라이온 전투

    목요일 7월 1, 1097도릴라이온 (현 터키 샤르회위크)

    튀르크 전술을 처음 경험한 것은 1097년 7월 도릴라이온 전투에서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부대가 매복 공격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노르만군은 본대가 도착하여 튀르크군이 퇴각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저항했습니다.

  10. 안티오키아 공성전

    수요일 10월 20, 1097안티오키아 (현재의 안타키아, 튀르키예)

    십자군 부대는 1084년부터 무슬림의 통치하에 있던 옛 비잔티움 도시 안티오키아로 진군했습니다. 십자군은 1097년 10월 안티오키아 공성전을 시작하여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11. 예루살렘 공성전

    수요일 6월 7, 1099예루살렘

    보에몽은 비잔티움에 도시를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안티오키아에 남아 도시를 차지했으며, '툴루즈 백작 레몽 4세'는 남은 십자군을 이끌고 해안을 따라 빠르게 남쪽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초기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1099년 예루살렘 공성전은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1099년 7월 15일 성벽을 돌파했습니다. 이틀 동안 십자군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12. 아스칼론 전투

    토요일 8월 12, 1099(현 아슈켈론)

    부용의 고드프루아는 1099년 8월 아스칼론 전투에서 이집트 구원군을 격파하여 프랑크족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13. 예루살렘 왕국

    1099예루살렘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부용의 고드프루아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수립되었습니다.

  14. 에데사 공성전

    화요일 11월 28, 1144에데사 (현 터키 샨르우르파)

    십자군 국가 중 첫 번째인 에데사는 1144년 11월 28일 제1차 에데사 공성전 이후 가장 먼저 함락되었습니다. 제2차 십자군 전쟁에 대한 요청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유럽 왕들이 이끄는 첫 번째 십자군이었습니다. 성지에서의 이 참담한 원정 성과는 교황의 위상을 손상시켰고, 왕국 내 기독교인들과 서구 사이의 관계를 수년간 악화시켰으며, 시리아의 무슬림들이 프랑크족을 물리치기 위해 더욱 노력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 십자군의 처참한 실패는 예루살렘 함락의 발판을 마련했고, 제3차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레콩키스타(국토 회복 운동)와 북방 십자군의 동시 캠페인도 때때로 이 십자군과 연관되어 언급됩니다.

  15. 교황으로 선출된 에우제니오 3세

    토요일 12월 1, 1145바티칸 시국

    최근 교황으로 선출된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12월 1일 교서 '퀀텀 프라에데세소레스(Quantum praedecessores)'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십자군을 촉구하는 최초의 교황 교서로, 제1차 십자군보다 더 조직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목표로 했습니다. 군대는 유럽의 가장 강력한 왕들이 이끌고 경로는 사전에 계획될 예정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1147년 6월에 출발했습니다.

  16. 리스본 공성전

    화요일 7월 1, 1147리스본, 포르투갈

    1147년 봄, 에우제니오 3세는 자신의 임무를 이베리아 반도로 확장하는 것을 승인하며, 무어인들에 대한 이 캠페인을 제2차 십자군의 나머지 부분과 동일시했습니다. 리스본 공성전은 1147년 7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17. 벤드 십자군

    1147(현 독일)

    북쪽에서는 일부 독일인들이 이교도인 벤드족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성지에서 싸우기를 꺼렸습니다. 그 결과 1147년에 일어난 벤드 십자군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18. 메안데르 전투

    12월, 1147뷔위크 멘데레스 강, 비잔티움 제국

    며칠 후, 그들은 1147년 말 메안데르 전투에서 다시 승리했습니다.

  19. 에페소스 전투

    수요일 12월 24, 1147에페소스 (튀르키예 셀추크)

    프랑스군은 터키 북부에서 콘라트 군대의 잔당들과 만났고, 콘라트('독일의 콘라트 3세')는 루이('프랑스의 루이 7세')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1147년 12월 24일 에페소스 전투에서 셀주크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20. 카드무스 산 전투

    화요일 1월 6, 1148피시디아

    루이('프랑스의 루이 7세')는 1148년 1월 6일 카드무스 산 전투에서 운이 따르지 않아 셀주크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군대는 전투와 질병으로 거의 전멸한 상태로 1월에 안티오키아로 향했습니다.

  21.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십자군

    금요일 3월 19, 1148안티오키아 (안타키아, 튀르키예)

    십자군 부대는 에데사를 탈환할 목적으로 1148년 3월 19일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으나, 목표는 다마스쿠스로 변경되었습니다.

  22. 다마스쿠스 공성전

    수요일 7월 28, 1148시리아 다마스쿠스

    불운과 서투른 전술로 인해 1148년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간 이어진 다마스쿠스 공성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23. 토르토사 공성전

    목요일 12월 30, 1148스페인 토르토사

    6개월간 이어진 토르토사 공성전은 1148년 12월 30일 무어인의 패배로 끝났다.

  24. 하틴 전투

    금요일 7월 3, 1187갈릴래아

    하틴 전투에서의 참담한 패배와 뒤이은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서유럽에 점차 전해졌다.

  25. 예루살렘 공성전

    금요일 10월 2, 1187예루살렘

    예루살렘 공성전은 1187년 9월 20일부터 10월 2일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벨린의 발리앙이 살라딘에게 도시를 항복하며 끝났다.

  26. 그레고리오 8세, '제3차 십자군'을 촉구하는 교서 '아우디타 트레멘디(Audita tremendi)' 발표

    목요일 10월 29, 1187바티칸 시국

    우르바노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그의 후임인 그레고리오 8세는 1187년 10월 29일 교서 '아우디타 트레멘디'를 발표하여 동방의 상황을 알리고 모든 기독교인에게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 왕국을 도우러 갈 것을 촉구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성지로의 새로운 십자군, 즉 제3차 십자군을 부르는 것이었다.

  27. 최후통첩과 도전

    1189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는 살라딘에게 팔레스타인 반환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전투를 제안했으며, 1189년 5월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비잔티움으로 출발했다.

  28. 아크레 공성전 (1189년)

    월요일 8월 28, 1189아코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1188년 1월 십자군 원정에 합의했다. 성지에 도착한 리처드는 교착 상태에 빠진 아크레 공성전에 지원군을 이끌고 합류했다. 무슬림 수비대는 1191년 7월 12일에 항복했다.

  29. 프리드리히, 소아시아로 출발

    3월, 1190소아시아

    1190년 3월, 프리드리히는 소아시아로 출발했다. 서유럽에서 온 군대는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며 튀르크군을 격파하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까지 진격했다.

  30. 프리드리히, 실리프케 성 근처에서 익사

    일요일 6월 10, 1190실리프케 성

    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는 실리프케 성 근처에서 익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수천 명의 독일 병사들이 군대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남은 독일군은 얼마 후 도착한 영국 및 프랑스 군대의 지휘 아래 이동했다.

  31. 아야디에 학살

    화요일 8월 20, 1191아코

    1191년 8월 20일, 리처드는 아야디에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에서 2,000명이 넘는 포로를 참수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살라딘은 기독교인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32. 필리프 2세의 귀환

    토요일 8월 31, 1191아코

    1191년 7월 31일 필리프 2세가 떠난 후, 리처드는 십자군을 단독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33. 아르수프 전투

    토요일 9월 7, 1191아르수프

    리처드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1191년 9월 7일 아르수프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격파했다.

  34. 살라딘, 군대 대부분을 해산

    목요일 12월 12, 1191성지

    1191년 12월 12일 살라딘은 군대 대부분을 해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는 군대를 진격시켜 예루살렘에서 12마일 떨어진 곳까지 도달했으나 다시 해안으로 퇴각했다. 십자군은 6월에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여 도시를 눈앞에 두었으나 다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족의 지도자인 부르고뉴의 위그 3세는 예루살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십자군은 두 파벌로 나뉘었고, 어느 쪽도 목표를 달성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었기에 군대는 해안으로 퇴각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5. 야파 전투

    월요일 7월 27, 1192야파

    1192년 7월 27일, 살라딘의 군대가 야파 전투를 시작하여 도시를 점령했다. 리처드의 군대는 바다를 통해 야파를 급습했고 무슬림들은 도시에서 쫓겨났다. 야파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살라딘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36. 야파 조약

    수요일 9월 2, 1192야파

    1192년 9월 2일 리처드와 살라딘은 야파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통제하에 남게 되었으나, 무장하지 않은 기독교 순례자와 상인들은 자유롭게 도시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제3차 십자군은 끝났다.

  37. 하인리히 6세 사망

    일요일 9월 28, 1197신성 로마 제국 메시나

    하인리히 6세는 1197년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다. 군대가 성지로 향하던 중, 하인리히 6세는 1197년 9월 28일 메시나에서 사망했다. 남은 귀족들은 시돈과 베이루트를 점령한 후 1198년 7월 1일 십자군 원정을 종료하고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티레와 트리폴리 사이의 레반트 해안을 점령했다.

  38.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새로운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선포

    토요일 8월 15, 1198바티칸 시국

    1198년, 새로 선출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샹파뉴의 테오발트, 블루아의 루이, 플랑드르의 보두앵 등 세 명의 프랑스인이 조직한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했다. 테오발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이탈리아인 몬페라토의 보니파초가 원정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그를 대신했다.

  39. 콘스탄티노플 약탈

    화요일 4월 13, 1204콘스탄티노폴리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 알렉시오스 3세는 도망쳤고 그의 조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스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을 이행할 때까지 십자군의 지속적인 지원을 구해야 했다. 이는 격렬한 반라틴 봉기 속에서 그의 살해로 끝났다. 십자군은 배, 보급품, 식량이 없는 상태였기에 알렉시오스가 약속했던 것을 무력으로 취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콘스탄티노플 약탈은 3일 동안 교회를 약탈하고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인 다수를 살해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약탈이 끝날 무렵, 대부분의 십자군은 임무를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십자군은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목표를 위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40. 인노첸시오 3세,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또 다른 십자군 촉구

    수요일 11월 11, 1215로마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또 다른 십자군을 촉구했다. 그는 교황 교서 '쿠이아 마이오르(Quia maior)'를 통해 십자군 설교, 모집, 자금 조달에 관한 기존 관행을 성문화했다. 헝가리의 앤드류 2세 왕과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가 이끄는 군대(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에서 모집)는 제5차 십자군으로 분류되는 원정에서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략은 이집트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이집트가 다른 이슬람 권력 중심지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방어하기가 더 쉬우며 식량 자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41. 다미에타 공성전

    1219이집트 다미에타

    레오폴트 6세와 브리엔의 장은 다미에타를 포위하여 점령했으나, 이집트로 진격하던 군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미에타는 반환되었고 8년 휴전이 합의되었다.

  42. 프리드리히 2세, 아크레 도착

    1228아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에 참여하겠다는 교황과의 약속을 자주 어겨 파문당했습니다. 1227년 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으나 질병으로 인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1228년 마침내 아크레에 도착했습니다. 문화적으로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에서 자랐고 무슬림 경호원을 두었기에 무슬림 세계에 가장 공감하는 기독교 군주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한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교적 수완 덕분에 제6차 십자군 전쟁은 무력을 뒷받침으로 한 협상으로 주로 진행되었습니다.

  43. 루이 9세가 이란의 몽골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다

    1249이란

    13세기 동지중해의 정치는 수많은 강력한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어 복잡했습니다. 프랑스는 매우 경건한 프랑스의 루이 9세와 야심 찬 팽창주의자인 그의 동생 나폴리의 샤를 1세가 이끌었습니다. 몽골과의 소통은 엄청난 거리로 인해 방해를 받았습니다. 루이는 프랑크-몽골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1249년 이란의 몽골 제국에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44. 제7차 십자군

    1249이집트

    루이는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제7차 십자군이라 불리는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하여 1249년에 도착했습니다.

  45. 프랑스의 루이 9세가 다미에타로 퇴각하던 중 포로가 되다

    수요일 4월 6, 1250이집트 다미에타

    프랑스의 루이 9세는 다미에타로 퇴각하던 중 포로가 되었습니다.

  46. 프랑스의 루이 9세가 만수라에서 패배하다

    화요일 11월 8, 1250이집트 만수라

    프랑스의 루이 9세는 만수라에서 패배했습니다.

  47.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시리아에 남다

    1254시리아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십자군 국가들을 공고히 하기 위해 1254년까지 시리아에 머물렀습니다.

  48. 아인 잘루트 전투

    금요일 9월 3, 1260아인 잘루트, 갈릴래아

    몽골의 침공으로 인한 위협으로 쿠투즈는 1259년 술탄국을 장악하고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다른 파벌과 연합하여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군을 격파했습니다. 이후 맘루크 왕조는 쿠투즈가 암살(대부분 바이바르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기 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를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49. 술탄 바이바르스가 프랑크인들을 소수의 해안 거점으로 몰아넣다

    1260년대아코

    1265년에서 1271년 사이, 술탄 바이바르스는 프랑크인들을 소수의 해안 거점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바이바르스에게는 세 가지 주요 목표가 있었습니다. 라틴인과 몽골인 사이의 동맹을 방지하고, 몽골인들(특히 킵차크 칸국과 페르시아 일 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며, 러시아 초원에서 노예 신병을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샤를과 교황청의 공격에 맞선 시칠리아 왕 만프레드의 실패한 저항을 지원했습니다. 십자군 국가 내의 불화는 성 사바스 전쟁과 같은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베네치아는 제노바인들을 아크레에서 티레로 몰아냈고, 그곳에서 제노바인들은 바이바르스의 이집트와 계속 교역했습니다. 실제로 바이바르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새로 복원된 통치자인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통해 제노바인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협상했습니다.

  50.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사망하다

    월요일 8월 25, 1270튀니스

    1270년 샤를은 자신의 형인 루이 9세 왕의 십자군 원정(제8차 십자군으로 알려짐)을 튀니스에 있는 반란군 아랍 봉신들을 공격하도록 설득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십자군 군대는 질병으로 황폐해졌고, 루이 자신도 8월 25일 튀니스에서 사망했습니다.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51.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

    1271성지

    미래의 영국 왕인 에드워드 왕자와 소수의 수행원들은 분쟁에 너무 늦게 도착했지만, 제9차 십자군으로 알려진 원정을 위해 성지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에드워드는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고, 10년 휴전을 협상한 뒤 영국으로 돌아가 국정을 관리했습니다. 이것으로 동지중해에서의 마지막 주요 십자군 노력은 끝이 났습니다.

  52. 트리폴리의 함락

    4월, 1289트리폴리

    트리폴리의 함락은 무슬림 맘루크 왕조에 의해 십자군 국가인 트리폴리 백국(현재의 레바논 지역)이 점령되고 파괴된 사건입니다.

  53. 아크레 공성전

    금요일 5월 18, 1291아코

    본토의 십자군 국가들은 1291년 아크레 공성전과 함께 마침내 멸망했습니다. 많은 라틴 기독교인들이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대피했거나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