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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이 타임라인의 이벤트
  1. 출생

    일요일 10월 7, 1900독일 뮌헨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는 1900년 10월 7일 뮌헨의 보수적인 중산층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사였던 요제프 게프하르트 힘러(1865년 5월 17일 ~ 1936년 10월 29일)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안나 마리아 힘러(결혼 전 성은 헤이더; 1866년 1월 16일 ~ 1941년 9월 10일)였습니다. 하인리히에게는 게프하르트 루트비히(1898년 7월 29일 ~ 1982년 6월 22일)와 에른스트 헤르만(1905년 12월 23일 ~ 1945년 5월 2일)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2. 힘러의 관심사

    1910년대독일 뮌헨

    10살 때부터 간헐적으로 작성한 힘러의 일기를 보면 그가 시사 문제, 결투, 그리고 "종교와 성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어린 시절의 훈련

    1915독일 뮌헨

    1915년, 그는 란츠후트 사관후보생단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4. 사관후보생

    12월, 1917독일 뮌헨

    그의 아버지는 왕실과의 인맥을 이용해 힘러가 사관후보생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했고, 그는 1917년 12월 제11 바이에른 연대 예비 대대에 입대했습니다.

  5. 제대

    수요일 12월 18, 1918독일

    1918년 11월, 힘러가 여전히 훈련 중이던 때에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면서 그는 장교가 되거나 전투에 참여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12월 18일 제대 후 그는 란츠후트로 돌아왔습니다. 전후 힘러는 김나지움 교육 과정을 마쳤습니다.

  6. 농학 공부

    1910년대독일 뮌헨

    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는 농장에서 짧은 견습 생활을 하고 병을 앓은 후 뮌헨 공과대학교(현재의 뮌헨 공대)에서 농학을 공부했습니다.

  7. 에른스트 룀과의 만남

    1920독일 뮌헨

    대학 2학년 때 힘러는 군 경력을 쌓기 위해 더욱 노력했습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뮌헨의 준군사 조직 활동에 더 깊이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나치당의 초기 멤버이자 돌격대(SA)의 공동 창립자인 에른스트 룀을 처음 만났습니다. 힘러는 훈장을 받은 전투 병사였던 룀을 존경했으며, 그의 제안에 따라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단체인 '제국전쟁기 협회(Bund Reichskriegsflagge)'에 가입했습니다.

  8. 유대인 문제

    1922독일 뮌헨

    1922년, 힘러는 "유대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일기에는 반유대주의적 발언이 늘어났으며 급우들과 유대인에 대해 나눈 대화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일기에 기록된 그의 독서 목록은 반유대주의 팸플릿, 독일 신화, 오컬트 서적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9. 힘러의 정치적 견해

    토요일 6월 24, 1922독일

    6월 24일 발터 라테나우 외무장관이 암살된 후, 힘러의 정치적 견해는 급진 우파로 기울었으며 베르사유 조약 반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10. 첫 직장

    1922독일 뮌헨

    초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면서 힘러의 부모는 세 아들을 모두 교육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군 경력을 쌓는 데 실패하고 부모가 박사 과정 학비를 대줄 수 없게 되자, 힘러는 농학 학위를 받은 후 저임금 사무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1923년 9월까지 이 직장에 머물렀습니다.

  11. 나치당 입당

    1923독일 뮌헨

    힘러는 1923년 8월 나치당(NSDAP)에 입당하여 당원 번호 14303번을 받았습니다. 룀의 준군사 조직원으로서 힘러는 히틀러와 나치당이 뮌헨에서 권력을 잡으려다 실패한 '맥주홀 폭동'에 가담했습니다. 이 사건은 힘러를 정치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그는 폭동에서의 역할에 대해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직장을 잃었고 농학자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뮌헨의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실패로 좌절한 그는 점점 더 짜증이 많아지고 공격적이며 독단적으로 변해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12. 가톨릭 포기

    1924독일

    1923~24년, 세계관을 찾던 힘러는 가톨릭을 버리고 오컬트와 반유대주의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오컬트 사상으로 강화된 게르만 신화는 그에게 종교가 되었습니다. 힘러는 나치당의 정치적 입장이 자신의 견해와 일치했기 때문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히틀러의 카리스마나 총통 숭배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 히틀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그를 당의 유용한 얼굴로 여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를 존경하고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치당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힘러는 맥주홀 폭동 이후 히틀러가 체포되면서 발생한 당의 혼란을 이용했습니다.

  13. 그레고어 슈트라서 밑에서 일함

    6월, 1924독일 뮌헨

    1924년 중반부터 힘러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밑에서 당 서기 및 선전 보조원으로 일했습니다. 바이에른 전역을 여행하며 당을 선동했고, 연설을 하고 유인물을 배포했습니다.

  14. 히틀러 밑에서의 첫 역할

    2월, 1925독일

    힘러는 1924년 말부터 슈트라서를 통해 바이에른 하부 당 사무소를 책임지게 되었으며, 1925년 2월 당이 재창당되었을 때 히틀러 휘하의 나치당과 해당 지역 당원들을 통합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15. 친위대(SS) 입대

    1925독일

    힘러는 친위대(SS)에 SS-지도자(SS-Führer)로 입대했으며, 그의 SS 번호는 168번이었습니다.

  16. SS에서의 첫 지도자 직책

    1926독일 뮌헨

    원래 훨씬 더 큰 조직인 돌격대(SA)의 일부였던 SS는 1923년 히틀러의 개인 경호를 위해 결성되었으며 1925년 SA의 정예 부대로 재편되었습니다. SS에서 힘러의 첫 지도자 직책은 1926년부터 바이에른 하부 지역의 SS-관구지도자(SS-Gauführer)였습니다.

  17. 부선전부장

    1월, 1927독일 뮌헨

    슈트라서는 1927년 1월 힘러를 부선전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나치당의 관례대로 그는 자신의 직책에서 상당한 행동의 자유를 누렸으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습니다. 그는 유대인, 프리메이슨, 당의 적들에 대한 통계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통제에 대한 강한 욕구에 따라 정교한 관료 조직을 구축했습니다.

  18. 친위대 제국지도자 대리

    9월, 1927독일

    1927년 9월, 힘러는 히틀러에게 SS를 충성스럽고 강력하며 인종적으로 순수한 엘리트 부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했습니다. 힘러가 적임자라고 확신한 히틀러는 그를 SS-오버퓌러(SS-Oberführer) 계급으로 임명하고 SS 부제국지도자(Deputy Reichsführer-SS)로 삼았습니다.

  19. 독립 조직으로서의 SS 운영

    1930독일

    1930년까지 힘러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SS를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SA의 하부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하게 했습니다.

  20. 제국 의회 의원

    1930독일

    1930년 9월, 힘러는 처음으로 제국 의회(Reichstag)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21.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임명

    1931독일

    힘러의 조직적이고 학구적인 지성은 그가 다양한 SS 부서를 설립하기 시작할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31년 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새로운 Ic 서비스(정보국)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이 조직은 1932년에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이드리히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좋은 업무 관계를 유지했으며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22. SS-오버그루펜퓌러

    일요일 1월 1, 1933독일

    1933년 1월 1일부로 히틀러는 힘러를 SS-오버그루펜퓌러(SS-Obergruppenführer) 계급으로 승진시켰으며, 이는 SA 고위 지휘관들과 동등한 계급이었습니다.

  23. 나치당의 성장

    1933독일

    나치당의 집권은 힘러와 SS에게 마음껏 번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1933년까지 SS의 규모는 52,000명에 달했습니다. 엄격한 입단 요건을 통해 모든 구성원이 히틀러의 아리아인 헤렌폴크("아리아인 지배 인종")임을 보장했습니다. 지원자들은 북유럽적 자질을 갖추었는지 심사를 받았는데, 힘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질되고 타락한 좋은 옛 품종을 재현하려는 묘목사와 같이, 우리는 식물 선택의 원칙에서 시작하여 SS 구축에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갔습니다." 힘러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르면 정작 자신은 그 이상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24. 힘러의 첫 공식 강제 수용소 설립

    3월, 1933독일 다하우

    1933년 3월, 나치가 집권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힘러는 다하우에 첫 공식 강제 수용소를 세웠습니다.

  25. 뮌헨 경찰청장

    3월, 1933독일 뮌헨

    1933년 3월, 바이에른 주지사 프란츠 리터 폰 에프는 힘러를 뮌헨 경찰청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힘러는 하이드리히를 정치 경찰 부서인 제4국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그 후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주마다 정치 경찰을 장악해 나갔고, 곧 프로이센만이 괴링의 통제하에 남게 되었습니다.

  26. 프로이센 비밀경찰대

    1933독일

    괴링은 1933년에 프로이센 비밀경찰대인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를 창설하고 루돌프 디엘스를 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괴링은 디엘스가 SA의 권력에 맞서 게슈타포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만큼 무자비하지 않다고 우려했습니다.

  27. 힘러의 테오도어 아이케 임명

    6월, 1933독일 바이에른 다하우

    히틀러는 이곳이 단순한 감옥이나 구금 시설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힘러는 1933년 6월, 전과자이자 열렬한 나치 당원이었던 테오도어 아이케를 임명하여 수용소를 운영하게 했습니다. 아이케는 독일 전역의 미래 수용소 모델로 사용될 시스템을 고안했습니다. 그 특징으로는 외부 세계로부터의 수감자 격리, 정교한 점호 및 작업 할당,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무력 사용과 처형, 그리고 경비병들을 위한 엄격한 규율 등이 있었습니다. 수감자와 경비병 모두에게 제복이 지급되었으며, 경비병의 제복 칼라에는 특별한 토텐코프(해골) 휘장이 부착되었습니다.

  28. 라이히스라이터(계급 이후의 계급)

    6월, 1933독일

    6월 2일, 힘러는 다른 두 나치 준군사 조직인 SA 및 히틀러 유겐트의 수장들과 함께 나치당 내 두 번째로 높은 정치적 계급인 라이히스라이터(Reichsleiter)로 임명되었습니다.

  29. 장검의 밤

    7월, 1934독일

    히틀러는 6월 21일 룀과 SA 지도부를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6월 29일 괴링을 베를린으로 보내 힘러 및 하이드리히와 만나 작전을 계획하게 했습니다. 히틀러는 뮌헨에서 직접 지휘를 맡아 룀을 체포했고, 그에게 자살하거나 총살당할 것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룀이 자살을 거부하자 그는 두 명의 SS 장교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30. 히틀러의 총통 취임

    수요일 8월 1, 1934독일

    1934년 8월 1일, 히틀러 내각은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 대통령직을 폐지하고 그 권한을 총리직과 통합한다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다음 날 아침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 겸 제국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라는 직함으로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 되었습니다.

  31. SS-토텐코프페르밴데

    1934독일 바이에른 다하우

    1934년 말까지 힘러는 SS의 보호 아래 수용소들을 장악하고 별도의 부대인 SS-토텐코프페르밴데(SS-Totenkopfverbände)를 창설했습니다.

  32. 뉘른베르크법

    일요일 9월 15, 1935독일

    1935년 9월 15일,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으로 알려진 두 가지 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이 법은 비유대인 독일인과 유대인 독일인 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유대인 가정에서 45세 미만의 비유대인 여성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또한 이 법은 이른바 "비아리아인"에게서 독일 시민권의 혜택을 박탈했습니다. 이 법들은 제3제국이 시행한 최초의 인종 기반 조치 중 하나였습니다.

  33. 반볼셰비키 투쟁 조직으로서의 SS

    1936독일 바이에른 다하우

    초기에 수용소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수용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범죄자, 부랑자, 일탈자 등 독일 사회의 바람직하지 않은 구성원들도 수용소에 배치되었습니다. 1936년 힘러는 "반볼셰비키 투쟁 조직으로서의 SS"라는 팸플릿에서 SS가 "유대-볼셰비키의 하등 인간 혁명"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기술했습니다.

  34. 독일 경찰청장 겸 내무부 차관

    수요일 6월 17, 1936독일

    1936년 6월 17일, 히틀러는 제국 내 모든 경찰력을 통합하는 법령을 공포하고 힘러를 독일 경찰청장 겸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했습니다.

  35. 수용소의 발전

    12월, 1937독일 바이에른 다하우

    1937년 12월에 발표된 히틀러의 법령은 정권이 사회의 바람직하지 않은 구성원으로 간주하는 모든 사람을 투옥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 집시, 공산주의자, 그리고 나치가 운터멘쉬(Untermensch, 하등 인간)로 간주하는 다른 문화적, 인종적, 정치적 또는 종교적 소속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따라서 수용소는 사회적, 인종적 공학의 메커니즘이 되었습니다.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6개의 수용소에 약 27,000명의 수감자가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사망자 수는 매우 많았습니다.

  36. 폴란드 침공

    1939독일

    1939년 히틀러와 군 수뇌부가 폴란드 침공을 위한 구실을 요구했을 때, 힘러,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뮐러는 '힘러 작전(Operation Himmler)'이라는 암호명의 위장 전술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실행했습니다. 폴란드 군복을 입은 독일군이 국경 분쟁을 일으켜 폴란드가 독일에 공격을 가한 것처럼 꾸몄습니다. 이 사건들은 나치 선전에 이용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점인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37.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1941독일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힘러는 소련 침공 계획을 앞두고 아인자츠그루펜을 재건했습니다.

  38. 힘러의 명령

    1941독일

    1941년 초, 힘러의 명령에 따라 10개의 강제 수용소가 건설되었으며, 수감자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습니다. 독일 전역과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게토에 감금되었습니다.

  39. 민스크에서 100명의 유대인 총살

    8월, 1941독일

    초기에는 가스 밴이나 총살형으로 희생자들을 살해했으나, 이러한 방식은 대규모 작전에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941년 8월, 힘러는 민스크에서 100명의 유대인이 총살되는 현장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그 경험으로 인해 구역질과 충격을 받았으며, 이러한 행위가 자신의 SS 대원들의 정신 건강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그는 다른 살해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40.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1독일

    1941년 말, 히틀러는 하이드리히를 새로 설립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부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체코인들을 인종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을 강제 수용소로 추방했습니다. 거세지는 저항 세력의 일원들은 총살당했고, 이로 인해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임명은 힘러와 하이드리히 사이의 협력을 강화했으며, 힘러는 국가에 대한 SS의 통제권을 갖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히틀러와 직접 소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드리히의 힘러에 대한 충성심은 확고했습니다.

  41. 유대인 절멸을 책임진 힘러

    화요일 1월 20, 1942독일

    인종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은 살 권리가 없다는 생각을 포함한 나치의 인종 정책은 당의 초기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며, 히틀러는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이를 논했습니다. 1941년 12월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무렵, 히틀러는 마침내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42. 동방 일반 계획(Generalplan Ost)

    7월, 1942독일

    독일은 이후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프랑스를 침공했고, 영국 침공 계획인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 Lion)'을 준비하며 영국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1941년 6월 21일, 소련 침공 하루 전날, 힘러는 '동방 일반 계획(Generalplan Ost)'의 준비를 지시했으며, 이 계획은 1942년 7월에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발트 3국, 폴란드, 서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를 정복하고 1,000만 명의 독일 시민을 이주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43. 국민돌격대(Volkssturm)

    화요일 9월 26, 1944독일

    1944년 9월 26일, 히틀러는 힘러에게 특별 군부대인 국민돌격대(Volkssturm, '국민의 폭풍' 또는 '국민군')를 창설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이 민병대에 징집될 대상이었으며, 이는 대체 불가능한 숙련 노동자들이 군수 생산에서 빠져나가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의 반대를 샀습니다. 히틀러는 600만 명을 동원할 수 있다고 자신했으며, 이 새로운 부대가 '침략자에 맞선 국민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44. 상부 라인 집단군 사령관

    1944독일

    1944년 6월 6일, 서방 연합군이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을 통해 프랑스 북부에 상륙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라인강 서안 알자스 지역에서 진격하는 미 제7군(알렉산더 패치 장군 지휘)과 프랑스 제1군(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장군 지휘)을 저지하기 위해 상부 라인 집단군(Heeresgruppe Oberrhein)이 편성되었습니다. 1944년 말, 히틀러는 힘러를 상부 라인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45. 북풍 작전(Operation North Wind)

    월요일 1월 1, 1945독일

    1945년 1월 1일,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북풍 작전(Operation North Wind)을 개시했습니다. 목표는 미 제7군과 프랑스 제1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전쟁의 마지막 주요 독일 공세였던 아르덴 공세의 남부 돌파구를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군이 초기에 제한적인 성과를 거둔 후, 미군은 공세를 저지했습니다. 1월 25일, 북풍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46. 급조된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

    목요일 1월 25, 1945폴란드 포메라니아

    1945년 1월 25일, 힘러의 군사적 경험 부족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그를 급조된 비스툴라 집단군(Heeresgruppe Weichsel)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포메라니아로 향하는 소련 붉은 군대의 비스툴라-오데르 공세를 저지하게 했습니다. 힘러는 슈네데뮐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자신의 특별 열차인 '존더추크 슈타이어마르크(Sonderzug Steiermark)'를 사령부로 사용했습니다.

  47. 비밀 평화 협상 계획

    1945독일

    1945년 초, 독일의 전쟁 노력은 붕괴 직전이었고 히틀러와 힘러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힘러는 독자적으로 평화 협상을 고려했습니다. 스웨덴으로 이주했던 그의 안마사 펠릭스 케르스텐이 스웨덴 적십자사 총재인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의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서신이 오갔고, RSHA의 발터 셸렌베르크가 직접적인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48. 마지막 만남

    금요일 4월 20, 1945독일 베를린

    힘러와 히틀러는 히틀러의 생일인 1945년 4월 20일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으며, 힘러는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날 군사 브리핑에서 히틀러는 소련군의 진격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을 떠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괴링과 함께 힘러는 브리핑 직후 서둘러 도시를 떠났습니다.

  49. 유대인 강제 수용소 석방

    토요일 4월 21, 1945독일

    4월 21일, 힘러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의 석방을 논의하기 위해 세계유대인회의의 스웨덴 대표인 노르베르트 마주르를 만났습니다.

  50. 힘러, 베르나도테와 직접 회담

    월요일 4월 23, 1945독일

    4월 23일, 힘러는 뤼베크의 스웨덴 영사관에서 베르나도테와 직접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독일의 임시 지도자라고 자처하며 히틀러가 며칠 내로 사망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힘러는 영국과 미국이 남은 독일 국방군과 함께 소련에 맞서 싸우기를 바라며, 베르나도테에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독일이 소련이 아닌 서방 연합군에 항복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51. 힘러의 SS 대표가 붙잡혀 총통 지하 방공호로 끌려오다

    금요일 4월 27, 1945독일

    4월 27일, 베를린 히틀러 본부의 힘러의 SS 대표였던 헤르만 페겔라인이 사복 차림으로 탈영을 준비하다 붙잡혔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총통 지하 방공호로 끌려왔습니다.

  52. 서방 연합군과의 협상

    토요일 4월 28, 1945독일 베를린

    4월 28일 저녁, BBC는 힘러가 서방 연합군과 협상을 시도했다는 로이터 통신 보도를 방송했습니다. 히틀러는 오랫동안 힘러가 요제프 괴벨스 다음으로 충성스럽다고 여겼으며, 그를 "충실한 하인리히"라고 불렀습니다.

  53. 힘러와 괴링은 반역자

    일요일 4월 29, 1945독일

    4월 29일, 자살하기 하루 전 히틀러는 힘러와 괴링 모두를 반역자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힘러의 모든 당직과 공직을 박탈하고 나치당에서 제명했습니다.

  54. 힘러 체포

    월요일 5월 21, 1945독일 니더작센주 브레머푀르데

    5월 21일, 힘러와 두 명의 보좌관은 브레머뵈르데의 검문소에서 전직 소련군 포로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구금되었습니다. 그 후 이틀 동안 그는 여러 수용소를 전전했습니다.

  55. 힘러의 죽음

    수요일 5월 23, 1945독일 니더작센주 뤼네부르크

    힘러는 숨겨두었던 청산가리 알약을 깨물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15분 만에 사망했습니다. 얼마 후, 힘러의 시신은 뤼네부르크 근처의 이름 없는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무덤의 위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